영등포 청년기자 청년을 만나다
은세공 전문 ‘Jo은공방’ 조새미 작가

[영등포투데이] 공방을 탐방하다 보면 어렸을 적 꿈꿔왔던 비밀기지가 떠오른다. 무엇에 쓰는지 모르겠지만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는 기구와 도구들, 어떤 작품이 탄생할지 기다려지는 작업대를 보면 괜스레 설레는 마음이다. 화려한 듯, 수수한 듯 섬세한 은공예 악세서리가 펼쳐져 있는 진열대에 정신이 팔렸다가, 공방의 2층에 들어서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언뜻 문래 철공소와도 닮아있는 이 작업실, 공방은 바로 문래동 ‘Jo은공방’이다.
주홍비 청년기자
 

평생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것
은세공을 전문으로 하는 ‘Jo은공방’의 조새미 작가는 학창시절부터 악세서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동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비즈를 사서 악세서리를 만들었어요. 파인 악세서리, 주얼리 핸드메이드 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면접을 아무리 봐도 들어가기 힘든 업계였죠.”
당시 압구정을 중심으로 한 주얼리 업계에서는 여성을 고용하지 않았다. 이력서를 내고 지원해도 남자가 대부분인 곳에서 불편하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다고. 결과물은 아름답고 섬세한 주얼리, 악세서리가 나오지만, 그 과정은 힘이 많이 들어가는 전문기술직으로 담배를 피우며 작업하는 거친 분위기였다.
“주얼리 종사자 중에 여성은 자의로, 타의로 프리랜서인 경우가 많아요.”
수많은 거절에도 꾸준하게 지원하여 귀금속 관련 회사에서 일을 하던 조 작가 역시 그러한 환경에서 프리랜서로 독립했다. 연남동에서 프리랜서 공방을 시작한 후, 3년 정도 잘 운영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2015년에 문래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때는 지금 공방이 있는 골목에서 공방은 거의 저 하나가 유일했어요. 안경공방 같은 곳이 있기는 했지만 저희 은공방처럼 오픈형은 아니었죠.”
아직 문래동이 철공소와 예술가들로 구성되어있던 때부터 지금의 독특한 문화와 구성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문래동을 꾸려온 것이다.

영등포와 문래동에서 만난 사람들
조 작가는 영등포의 특이한 점들을 좋아한다. 최첨단의 새로운 건물들과 낙후된 건물이 섞여 있는 곳, 유명한 백화점과 좋은 교통이 보장되어 있지만 골목골목을 찾아보면 오래된 작은 건물들과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철공소의 작업 장면 등이 창작가들에게는 많은 영감을 준다고 한다. 그렇게 자리를 잡게 된 문래동에서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재미있는 공방 작가들을 만나게 됐다.
“제가 문래동 오기 전에도 공방을 했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한 골목에 공방이 여러 군데 모여있고 공방 선생님들이 함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던가 하는 게 생각보다 없어요. 이런 지점 덕분에 공무원 선생님들이랑 플리마켓 등 활동이나 협업을 할 수 있었어요.”
공방 작가들이 하는 일은 당연히 일반 회사원과는 다르다. 때문에 손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공방의 일을 나누고 함께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문래에 모여 있는 것이 참 소중한 선물이라고 한다. 함께 있다는 메리트로 보다 새로운 것들도 함께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각각의 다른 분야의 선생님들이 모이니까 새롭게 기획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보통의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공방이라는 장소와 체험을, 문래동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서울 어디를 가면 이런 곳을 만날 수 있을까. 또한 문래동의 공방들은 지역 공무원, 교육청 등과 협업해서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만들고 즐겁게 하는 중이다. ‘Jo은공방’의 입구에는 ‘방과 후 마을학교’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문래동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에는 공방 선생님들도 크지만, 이제는 훌쩍 커버린 꼬마 손님도 기억이 나요. 지금은 양화중학교에 다니고 있대요.”
플리마켓에서 가족끼리 와서 구경하던 초등학생 꼬마는 부모님을 졸라 목걸이를 얻었다고 한다. 저학년인 손님에게 맞추기 위해서 목걸이 줄을 줄여줬지만, 공방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던 꼬마는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최근에는 다시 목걸이 줄을 늘여달라고 찾아왔다.
“재미있는 경험이 많아요. 주얼리 수선을 위해 찾아온 손님의 의뢰품을 보니까, 사실 예전에 제가 만들었던 악세서리더라고요!”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
오랫동안 문래동 공방을 지켜운 ‘Jo은공방’ 역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오른 평당 월세에 법적 기준을 근거로 제시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저
“문래동은 원래 이래.”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다. 겪어본 적 없는 분쟁에 주변에 도와줄 사람을, 법 전문가를 수소문해서 대응을 해봐도 건물주는 차단이나 무시로 답할 뿐이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 ‘내용증명’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보내봤어요. 하지만 절대 확인하지 않으시더라고요. 나중에 보니 절 차단(휴대폰 번호를 알림이 뜨지 않게 처리해두는 것)하신 것이었어요. 확인하지 않았으니 그 내용증명은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앞 상권도 대표적으로 지금 많이 죽었잖아요. 거기도 원래 작은 상점들이 많고 활성화되었던 곳인데, 지금 가보면 공실이 많아요. 이런 식으로 문래도 결국 재개발 이슈 때문에 철공소도 빠지고, 예술가들도, 공방 작가들도 빠지면 그냥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술집 골목이 되고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영등포 주민들에게도 좋은 일일까요?”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를 직접 겪고 있는 조 작가는 그것 때문에 힘들지만 또 변화는 막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죠. 땅과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가 분명히 있고, 변화를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함께 합의점을 찾는 것, 법적 테두리 안에서 협의해보는 것, 그것도 안되는 것일까요?”
그저 몇 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 작가 주변의 공방 작가들은 모두 겪었다고 한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 기준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의 동시다발적인 월세 인상.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공방 작가 개개인이었다고.
“이런 문제는 서울에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개인이 대응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이것을 중재해줄 수 있는 단체나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문래동 100년 가게 꿈꾸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깨어 지내고,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일들을 문래에서 하고 있어요. 이제는 정감 가는 나의 동네죠. 서울에서 작가들과 공방들이 모여있는 곳은 이제 여기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가 문래를 사랑하듯, 이곳의 작가들도 문래를 사랑한다. 혹은 사람들이 문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문래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문래의 독특함 때문에 이제는 술집과 상권이 생기고, 월세는 오르고, 누군가는 내쫓긴다. 마을 주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장소는 사라지고 술을 마시고, 담배 연기를 내뿜고, 들렀다 사라지는 유흥과 소비의 공간이 된다.
마을과 동네, 도시를 구성하는 것에 이제는 함께 고민하고 꿈꾸는 것이 어떨까? 문래동은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서울시의 ‘미래유산’ 영단주택단지, 철공소로 대표되는 제조단지, 그리고 이곳에 모여든 예술가와 창작자들이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것들까지.
“제가 보기에도 재개발 자체를 막을 수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소중한 자산이잖아요. 문래 2, 3, 4가 만이라도 유지한다던가 하는 방법은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일까요?” 더욱더 함께 상상력을 발휘할 때이다.
“모아두었던 소중한 귀금속을 수리하고 싶어 가져오시는 주민분들, 할머니의 유품을 새롭게 세공해서 간직하려는 손녀, 처음에는 경계하시다가 이제는 과일과 참기름을 가져오시는 철공소 사장님들까지, 너무 사랑스러운 기억이에요. 일본 장인의 100년 가게처럼, 100년 가게의 시작을 문래동에서 하는 것은 욕심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소소하고 따뜻한 마을의 풍경, 아름다운 예술문화, 격동의 세월을 품고 있는 역사까지 여기 문래에 있다. 우리가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문화도시 역시 이곳에 있다. 우리가 문래동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저작권자 © 영등포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