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국보문학』 2024년 1월호 특별기고
1961년 18살 초등학교 교사 시절부터 잊혀 가는 정신대 문제 제기
1990년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로 큰 성과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는 “문학사에 길이 기록될 수작”으로 평가
1991년 ‘정신대 위령의 날’ 제정 및 ‘국제 사람몸 존중의 날’ 제정 제의

허만길(시인·문학박사)
허만길(시인·문학박사)

[영등포투데이] 허만길 문학박사(시인. 소설가)가 18살 1961년 초등학교 교사 시절부터 역사의 뒷전으로  잊혀 가는 정신대(종군위안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두고만 볼 수 없어, 꾸준히 문제 제기해 마침내 성과를 거두기까지의 과정을 논문으로 만든 <허만길의 정신대 문제 최초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1990년) 창작 과정과 성과>를 월간 『한국국보문학』 2024년 1월호에 36쪽 분량으로 발표했다.
 허만길 박사는 1961년 3월 자신이 교육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정신대 문제는 이미 역사의 뒷전으로 깊이 숨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1965년 6월에 조인된 ‘한일협정’(한·일 간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에서조차 정신대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음이 이를 말해 준다고 했다.

◆ 일제의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
허만길 박사는 일제 때 한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정신대는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정신대’란 말은 1944년 8월 일본 국왕이 칙령으로 내린 ‘여자정신근로령’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도 이미 ‘정신대’란 말이 널리 쓰여 왔으며 많은 한국 여성들이 정신대로 징발됐다고 했다.
1944년의 ‘여자정신근로령’은 징용 대상의 여자 나이를 12〜19세로 정해 초등학교(소학교) 어린이까지도 징용 대상에 포함했음을 입증하는데, 근로정신대로 징용된 여인들은 주로 일본 등지의 군수공장에서 갖은 학대를 받으며 근로에 종사했다고 했다. 한편 종군위안부(일본군위안부)로서의 정신대는 대체로 15세 이상의 여인들을 대상으로 끌고 갔으며, 근로정신대 중에서도 선발했다고 했다. 
  
◆ 한국과 일본에서 애국활동을 한 아버지의 교훈
허만길 박사는 한국과 일본에서 항일 애국활동을 한 아버지 허찬도(許贊道. 개명 전 허기룡 許己龍. 1909~1968년) 선생에게서 일제가 저지른 나쁜 일들을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는데, 그 가운데는 한국의 여인들이 정신대(종군위안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몹쓸 짓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포함돼 있어, 늘 그것이 안타까워 부산에서 교육자의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이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다고 했다.

◆ 본격적 정신대 문제 최초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1990년) 발표
부산 시내 초등학교 교사, 중학교 교사, 서울 시내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87년 3월(43살)부터 문교부(교육부) 공직인(국어과 편수관. 공보관실 연구사.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으로 근무하면서도, 허만길 박사는 기회 있을 때마다 너무 많이 잊어 진 정신대 문제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언론이나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가끔 정신대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큰 파급 효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허만길 박사는 대중성이 높은 소설 작품을 통해서 이 문제를 부각한다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미 허만길 박사는 1971년(28살) 세계 최초로 복합문학(Complex Literture)을 창시해 최초 장편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를 출판하고, 월간 『현대문학』 1973년 9월호에 수필을 발표하고, 1989년 2월 『한글문학』 제9집을 통해 시를 추천받아 문학 창작 활동을 해 오던 터였다.  
마침내 허만길 박사는 반세기 동안의 시간적 배경과 한국, 만주, 중국, 타이완 등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정신대(일본군위안부) 문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를 『한글문학』 제12집(1990년 가을•겨울호. 편자: 한글문학회 회장 안장현. 발행: 미래문화사, 서울. 발행일: 1990년 10월 5일)에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구인환(문학평론가, 소설가) 교수는 이 단편소설은 “역사의 공간 속의 참신한 제재”라는 제목 아래 “일제의 압정에 항쟁하며 독립의 열매를 키우던 치열한 삶이 해외동포의 고국 방문이란 연결고리로 외손인 민속학도에 의해 그 신비가 벗겨지는 충격과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추리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성으로 치밀하게 서사의 핵을 구조화하는 기법이 좋다.”라고 했다.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정신대 문제를 다룬 최초의 단편편소설로 간주되고 있는데, 발표 즉시 문인과 언론을 비롯해 각계로부터 큰 관심을 끌면서, 잊혀 가던 정신대 문제를 일깨우는 촉매 역할을 했다. 정부의 중앙행정기관 공무원들도 허만길 박사의 소설과 정신대 문제를 화제로 삼았으며, 1990년 11월 초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국소설가협회의 세미나에서는 허만길 박사의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야말로 잃어버릴 뻔했던 한국 문학의 한 사명적 영역을 일깨워 준 훌륭한 작품이며, 한국 소설가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한글문학회 회장 안장현 시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는 “문학사에 길이 기록될 수작”이라고 극찬하고, 한글문학상 시상식에서도 인사말을 통해 극찬했다.

◆ ‘정신대 위령의 날’ 제정 및 ‘국제 사람몸 존중의 날’ 제정 제의(1991년)
허만길 박사는 이 단편소설로 1991년 11월 30일 한글문학상 신인상을 받는 것을 계기로 각계에 ‘정신대 위령의 날’ 제정 및 ‘국제 사람몸 존중의 날’ 제정 제의(유인물. 1991년 11월 30일)를 하면서, 계속 종군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관심사로 환기시킴과 동시에 정신대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작품 세계에서 정신대(종군위안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외할머니와 얼굴 모르는 외손녀가 광복 반세기가 돼서야 1990년 8월 13일(음력 6월 23일) 처음 만남을 유의해 해마다 8월 13일을 ‘정신대 위령의 날’ 및 ‘국제 사람몸 존중의 날’로 삼아도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언론에서는 『한국일보』(1992년 1월 6일), 『동아일보』(1992년 1월 17일), 『조선일보』(1992년 1월 18일), 『동아일보』(1992년 1월 21일), 『주간경향』(1992년 2월 9일),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비상기획위원회 공동 발행 『비상기획보』(1992년 봄호. 1992년 3월 1일) 등이 호응해 주었다. 
그리고 1992년 1월 언론에서 일제 때 12살 초등학교 어린이들마저 정신대(*근로정신대인 듯함.)에 끌려간 사실이 뚜렷이 드러났다고 하자, 그동안 허만길 박사가 꾸준히 제기해 온 정신대(종군위안부) 문제도 급속도로 국내외의 큰 관심을 끌었다.
 허만길 박사는 논문에서 정신대 문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를 완성해 가던 즈음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때맞추어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여대생대표자협의회가 정신대 문제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한 일, 1990년 10월 5일 허만길 박사의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 직후 1990년 10월 17일 여성 단체가 정신대 문제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낸 일,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 단체가 중심이 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한 일, 1991년 8월 14일 정신대 피해자 김학순 님이 기자 회견을 한 일 등도 정신대 문제 제기 및 해결을 위해 주요 역할을 했다고 기술했다.

 ◆ 영화인들도 정신대 문제와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관심(1991년) 
허만길 박사는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를 영화로 만든다면 국내외 여론 환기에 적잖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 3개월 후 1991년 1월 16일에는 한국영화인협회 사무장 정영국 님과 서울 충무로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정영국 님은 1991년 12월에 춘사(나운규) 영화 예술상 5개 부문 수상, 청룡 영화상 4개 부문 수상, 1992년 대종상 영화제 9개 부문 수상을 한 영화 『사의 찬미』(감독 김호선. 주연 장미희, 임성민) 조감독이었다. 정영국 님은 정신대 문제라는 특별한 의미가 가슴에 와 닿는다며, 자신의 감독으로 ‘원주민촌의 축제’를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고 시나리오 작가를 선정했으나 작가가 각색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정영국 님은 그해 1991년 12월 28일(토요일) 오후 5시부터 밤늦게까지 서울 충무로 소피텔앰버서더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진행된 제2회 ‘춘사(나운규) 영화 예술상’ 시상식에 허만길 박사를 초대했다. 많은 영화인들이 참여하는 자리였다. 정영국 님은 허만길 박사를 영화인들에게 정신대 문제를 다룬 작가임을 소개했는데, 남녀 배우와 감독들은 영화 예술상 시상식에 문인이 초대된 것을 매우 의미 있게 생각했다.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의 텔레비전 밤 9시 뉴스에서는 허만길 박사가 시상식 주요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그 이후로 정영국 님과의 연락은 끊기었지만, 영화인들도 정신대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의 문학적 영광  
허만길 박사는 정신대 문제 제기 활동과 정신대 문제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를 주요 공로로 2004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제56주년 ‘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표창을 받았다.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는 2007년 3월 『두산백과사전』(발행 주식회사 두산)에 등재돼, 설명됐다. 등재 항목은 ‘원주민촌의 축제’[原住民村의 祝祭, A Feast in the Village of Natives〕인데, 인터넷 사이트 『네이버』(http://www.naver.com)에서 ‘원주민촌의 축제’라고 검색하면, 『두산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통해 이 작품의 문학적 의의와 줄거리를 알 수 있다.
2008년 보령시 『시와 숲길 공원』(시인의 성지)에 건립한 ‘한국현대문학 100주년 기념탑’ 앞의 ‘빛나는 한국문단의 인물들’에는 “허만길: 시인, 소설가. 「원주민촌의 축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는 문인들의 좋은 평가와 언론을 비롯한 각계의 관심을 받으면서 많은 영광스러움을 안았다. 허만길 박사의 정신대 문제 제기 활동 과정은 허만길의 저서 『정신대 문제 제기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운동 회고』(발행 에세이퍼블리싱, 서울. 2010년 12월 21일)에도 나타나 있다. 『한글문학』 제12집(1990년)에 처음 실렸던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도 이 책에 다시 실렸다. 월간 『신문예』 발행인 지은경 문학박사의 요청에 따라, 월간 『신문예』 제94호 2018년 7•8월호(발행 도서출판 책나라, 서울)에 이 단편소설을 또 다시 실어, 세상 사람들의 정신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문학사의 자료로 남게 됐다.

[허만길 약력]
허만길 박사는 17살(1960년) 진주사범학교 학생회위원장 겸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으로서  진주의 4.19혁명을 앞장서서 이끌었으며, 진주극장 앞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선언문을 낭독했다. ‘4.19혁명 60주년 기념 특별기고’로 월간 『한국국보문학』 2020년 4월호(서울)에 35쪽 분량의 논문 ‘진주의 4.19혁명 상황과 허만길의 선언문 회고’를 발표해, 충절의 도시 진주의 역사 자료로 남게 했으며, 문단과 진주 시민과 신문과 방송의 큰 관심을 모았다. 
국가시행 교원자격검정고시 수석합격으로 최연소 중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18살) 및 수석합격으로 최연소 고등학교 국어과교원자격증(19살)을 받았으며, 그 최연소 기록은 『기네스북』의 ‘한국편’에 등재됐다. 1971년(28살) 세계 문학 사상 최초로 ‘복합문학’(Complex Literature)을 창시(창안)해 첫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를 월간 『교육신풍』 1971년 9월호~11월호(발행 교육신풍사, 서울)에 일부 연재하고, 1980년 교음사(서울)에서 단행본으로 발행했다. ‘복합문학’은 『두산백과사전』(2001. 9. 1.) 등 여러 문헌에 등재됐다.
서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교사 재직 중 1968년(25살)부터 우리말 사랑 운동을 전국 규모로 펼치면서, 1971년(28살) 문교부(교육부) 언어생활 연구위원 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경복고등학교 우리말사랑하기회(국어계몽반) 운영을 통해 계속 우리말 사랑 운동을 전국 규모로 펼쳤는데,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어 순화 운동을 국가적, 제도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국어 사랑의 이론 정립에 공헌했다.
1985년 3월(42살)부터 1987년 2월까지 서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야간 특별학급 교사로 근무하면서, 주로 한국수출산업공단(서울 구로공단)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낮에는 산업체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는데, 특히 대우어패럴 노사분규 사태 등으로 일자리와 기숙사 잠자리를 잃은 160여 명의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도와 모두 졸업의 영광으로 이끌어 1987년 상공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정식 국교가 없던 시기에 문교부(교육부)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로서 교원국외연수단을 인솔해, 1990년 6월 13일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마당로 馬當路)를 찾았으나, 아무 표적 없이 퇴색된 집에 중국 사람이 살고 있음을 보고, 연수단 앞에서 현장 즉흥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를 읊고, 귀국 후 온갖 노력으로 대한민국 광복 후 최초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 보존운동을 펼쳐 성과를 거두어 마침내 그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리 보존운동 시초가 되는 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자리’는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돼 해외에 소개되고, 2010년 4월 23일 충청남도 보령시 ‘시인의 성지’(시와 숲길 공원)에 제1호 시비로 건립됐다.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교육학 석사, 홍익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허만길 박사는 문교부(교육부) 국어과 편수관(1987년), 문교부 공보관실(대변인실) 연구사,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 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 서울특별시교육연구원 진로교육연구부 연구사, 한국진로교육학회 이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연구위원,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과 교과서 편찬연구위원, 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연구소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 서울 당곡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2024년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월간 한국국보문학 편집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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