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정(시인, 육필문학관장 )

[영등포투데이]

가장 낮은 자세로
아무 생각없이 살아보기로 했다.
구름을 베개 삼아 바람부는대로 물결이 일렁이는 곳에 마음을 내려놓고 새들의 지저귐과 별빛에 밤마다 말려가는 두꺼비의 굵은 노래를 들으며 한달을 살았다.

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과정을 지켜보며 야자수나무 사이로 많은 사념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갔다.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마주하며 같은 시간이지만 각기 다른 형상으로 내 마음속에 다른 빛으로 각인됐다.
때 되면 밥주고 정해진 시간 운동하고 때마다 빨래해 주고 청소까지 해 준다.
사소한 일하나 나의 손길이 필요없는 일정, 그 시간의 굴레 속에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멍 때리며 호수를 걷고 세상을 향해 쏟아지는 소낙비를 바라보면서 늙은 야자수나무에 애써 지어 논 흰개미집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난 무엇을 느꼈는가.
저 멀리 굴곡 심한 산들이 병풍처럼 초원을 호위해 주고 맑은 눈동자 같은 호수가 있는 드넓은 초원 한 가운데에서 30일이라는 시간을 보내 보았다.
시끄런 소음도 없고 내가 자주 찾는 선술집도 없다.
문명의 혜택이 하나도 없는 적막속에서 살았다.
첫날은 하루가 한달같이 느껴졌었다.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한달이 하루처럼 짧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순간이 왔다.

내 인생에 있어 이렇게 단조로운 일정을 보내 보았다는 것이 그리고 베짱이처럼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이번 여행은 비움의 시간이었다.
미래에 단조롭게 살아야 할 내 삶의 예행 연습이었다.

필리핀 클락 어느 외진 곳에서 
한달 살이를 끝내며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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