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의 유래를 찾아서

​▲ 오백채 문래2동(1970년대)
​▲ 오백채 문래2동(1970년대)

[영등포투데이] 문래동은 1930년대 방직공장이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에게 사옥정(絲屋町), 실을 뽑는 업체가 많은 마을의 의미로 불리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지명의 유래로 ‘글이 왔다’ 해 문래동이 됐다는 설도 있지만, 방직공장이 많았던 연혁으로 볼 때 실을 짓는 ‘물레’에서 변형됐다는 쪽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지금의 문래동 4가 일대를 ‘오백채’라고 불렀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에 대량으로 공급한 서민주택인 영단주택을 가리킨다. 1920년대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조선에 방직공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는데 그 즈음 일본의 물자부족으로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해 조선을 중간 병참기지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이미 공장지대가 형성돼 있던 영등포를 최적의 장소로 선택한다. 문래동에 노동자와 일본인 관리 인력이 거주할 주택을 공급할 계획을 세우고 조선영단주택을 설립, 총 659가구를 공급하였는데 ‘오백채’라는 옛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오백채’의 서쪽 지점을 ‘간밭’이라고 불렀고, 오목내 다리(현 오목교) 근처의 문래 2동 밭 지대를 ‘강께밭’이라고 불렀다.

​▲ 영등포공장지대파괴모습(1950년대)
​▲ 영등포공장지대파괴모습(1950년대)

1960년대 산업화 정책으로 문래에는 제철, 철강이 들어서며 어두운 이미지가 강했다. 1980년대에는 청계천에서 이주해 온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이 문래 4가 영단주택에 입주해 자리잡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홍대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문래동에 자리 잡게 되고 문래동은 소규모 철강공장과 예술가의 작업실, 개성 강한 카페가 들어서면서 문래만의 독특한 지역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이름(人名)이 있듯이, 땅에도 이름(地名)이 있다.

지명은 그 지역의 자연지리적 조건 혹은 사회와 산업 특징을 함축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지명 유래에 담긴 뜻을 알면, 자기 동네 그리고 곳곳의 산, 고개, 강 등의 자연적 특징 및 역사를 이해하는 출발점, 혹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제공 - 영등포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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