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시범아파트 ⑨

‘영등포’는 근·현대사적 시·공간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사고가 도시 발달 과정에 배태한다. ‘역사정치’는 (1) 역사와 정치의 학제적 융합, (2) 역사로부터 정치적 교훈의 도출, (3)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따른 사료와 해석의 제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포함한다. 결국, 영등포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의 시·공간에서 ‘정치의 역사에 대한 전략석 해석’을 지양하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영등포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학제적 시도이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자료출처: 영상역사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자료출처: 영상역사관)

여의도시범아파트 연재 목록
제1편(2022/10/5, 12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제2편(2022/10/25, 13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제3편(2022/11/8, 7면) 
‘두더지 시장’ 양택식, 건설·홍보 분양 진두지휘
제4편(2022/11/23, 7면)
여의도 서재 “관수재” 주인, 시인 구상
제5편(2022/12/6, 7면)
서울특별시의 재정난을 해결한 고급아파트, ‘여의도 시범아파트’
제6편(22/12/20, 7면)
서울특별시의 재정난을 해결한 고급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
제7편(23/1/18, 7면)
‘시범’의 역사와 함께 한 여의동주민센터와 천주교여의도동성당
제8편(23/2/6, 7면)
‘시범’에서 태동한 서울미래유산


■ 공간 디자이너 박정희와 여의도 아파트 건설
박정희(朴正熙, 1917-1979) 집권 이후 국토는 더 이상 ‘주어진 공간’이 아닌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보편적 인식이 확산하면서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근대적으로 전환한다(전상인 2019, 53). 도시계획은 박정희 집권 이후 1960년대 국가 주도의 산업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필요해졌는데, 이는 (1)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도시공간의 선제적 개발, (2)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사회문제 해결의 정치적 의도의 일환에서 추동한다(전상인 2019, 110).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의지가 국토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반 및 계획적 장치를 구축하였고, 특히 국토정책이 경제개발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점차 체계화한다(전상인 2019, 53). 박정희는 수도 서울의 도시계획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고도 경제성장기인 1960~70년대 서울은 ‘조국근대화의 표상’이자 ‘경제발전의 최대 수혜 도시’로 발돋움한다(전상인 2019, 127). 박정희에게 서울은 단순한 도시 이상의 공간으로 ‘조국근대화’와 ‘경제발전’을 달성하려는 지도자로서 민족 자립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축적된 국가 역량을 확인하는 무대였다(전상인 2019, 140). 하지만,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프로젝트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야기하는 사회구조적 산물로서 주거문제의 ‘개선’이 아닌 ‘악화’의 요인을 배태(胚胎)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산업화’와 ‘도시화’가 초래할 주택문제를 예상한 박정희는 이를 경제계획의 본질적 일부로 인식해 주택정책을 보다 체계적으로 계획・실천해 아파트의 대량생산 및 공급을 추동한다(전상인 2019, 153-5). 당시 아파트 건설은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를 실현하는 중요한 사업의 일환이었다. 산업화의 화신(化身) 박정희는 주택문제의 돌파구로 아파트 공급을 선택한다(전상인 2019, 172). 여기에는 (1) 고도 경제성장의 결과 아파트를 구매할 새로운 중산층 실수요자가 등장한 점, (2)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 초창기 불량 시민아파트의 오명을 여의도시범아파트단지, 한강맨션의 건설로 고급주택의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시킨 점, (3) 1960년대 경제개발 과정에서 함께 성장한 건설산업이 뒷받침을 이루었기에 가능했다(전상인 2019, 163).

여의도시범아파트 입구 기념탑 후면부 비문 (사진=박현우)
여의도시범아파트 입구 기념탑 후면부 비문 (사진=박현우)

■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와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서울시는 홍수 방지를 위한 수로 조정의 필요성에서 밤섬을 폭파해 한강변에 제방을 쌓은 위에 강변도로를 건설하며 여의도에 위치했던 군사 비행장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윤중제를 쌓겠다는 개발계획을 수립한다(서울역사편찬원 2021, 152). 1968년 5월 말 여의도 제방 축조 공사가 가시권에 접어들자 한강건설사업소에서는 “새서울 건설! 금년에 이룩될 한강여의도 강변도시 창조”라는 제목으로 (1) 강변도시 건설, (2) 여의도 개발, (3) 고속도로 및 교량 건설, (4) 공원 및 유원지 개발을 알리는 신문 광고를 게재하며 본격적인 여의도 개발 시대를 알린다(서울역사편찬원 2021, 154).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은 김현옥(金玄玉, 1926-1997) 서울시장은 군복무 시절 수송학교장과 부산시장으로서의 경험, 건설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차일석(車一錫, 1931- )과의 만남을 통해 통제불능의 서울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서울역사박물관 2016, 23). 박정희를 대신한 김현옥은 특유의 즉흥적이고 저돌적인 자세로 서울 시내를 누비며 강변북로, 세운상가, 여의도 윤중제, 북악스카이웨이, 남산 1・2호 터널, 서울역 고가도로, 시민아파트 등을 건설하고, 오늘의 서울을 있게 한 뼈대인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한다(전상인 2019, 136-7).
하지만, ‘불도저’ 김현옥을 한순간에 멈춰 세운 것은 ‘속도전’과 ‘부실공사’의 모호한 경계 속에 발생한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였다(전상인 2019. 139).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창천동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해 김현옥은 사의를 표하고, 후임인 양택식(梁鐸植, 1924-2012) 서울시장이 여의도 도시계획을 수정해 택지 개발을 서두른다(영등포투데이 2022/10/5, 12).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를 계기로 아파트 건설의 방향은 여의도시범아파트로 대표되는 “중산층을 위한 비싸지만 보다 안전한 아파트”로 선회한다(서울역사박물관 주요유물소개 여의도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이는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에 따른 국민들의 불안감 확산을 조기에 종식하고, 아파트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실제 양택식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로 실추된 서울시 건설 수준의 신용을 “시범적” 아파트단지 건립으로 회복시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었다(손정목 2005, 283). 양택식은 여의도시범아파트의 건설, 홍보, 분양을 직접 진두지휘한다(영등포투데이 2022/11/8, 7).
양택식은 “모두가 살기좋은 대 서울을 건설하려는 의욕과 협동의 결실이요 상징”이라면서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조국근대화 과업완수에 이바지하려는 우리의 줄기찬 노력은 이제 그 열매가 하나 하나 알차게 영글어 가고 있으며 이 아파트의 건립 또한 그 결실의 하나”라고 1971년 10월 여의도시범아파트 기념탑 비문에 새긴다. 1970년 9월 15일 착공한 여의도시범아파트는 1971년 10월 30일 완공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가진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68; 손정목 2003, 77).

“여기 불모의 땅이었던 여의도를 개발하고 그 일각에 시민의 보금자리가 될 아담하고 현대적인 24동의 아파트를 세웠읍[습]니다. 이는 오로지 우리 모두가 살기좋은 대 서울을 건설하려는 의욕과 협동의 결실이요 상징이라고 하겠읍[습]니다.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조국근대화 과업완수에 이바지하려는 우리의 줄기찬 노력은 이제 그 열매가 하나 하나 알차게 영글어 가고 있으며 이 아파트의 건립 또한 그 결실의 하나입니다. 앞으로 여의도는 명실공히 수도 서울의 심장부로써[서] 꿈과 정서가 깃든 이상도시로 건설돼 나갈 것을 확신하며 이 곳이 입주자 여러분의 복되고 보람찬 삶의 터전이 되기를 기원하고 이 일을 위해 성원해 주시고 애써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71년 10월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_ 여의도시범아파트 입구 기념탑 후면부, 양택식 서울시장 비문 전문

조선일보 1971/12/30, 7면
조선일보 1971/12/30, 7면
여의도시범아파트 네러티브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 Visualizing the invisible’ 전시 (자료출처: 홈페이지 https://plottingarchitecture.org)

■ 대연각호텔화재사건과 아파트 외벽 철구조물 디자인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 오전 9시50분 경, 호텔 2층 커피숍에서 프로판가스 취급 부주의로 가스통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재가 덕트와 엘리베이터 통로를 따라 순식간에 21층까지 번지면서 높이 80여 미터, 지상 21층의 국내 굴지의 대형 건물인 대연각 호텔이 화마에 휩싸인다(손정목 2005, 69-70). 공휴일 낮에 발생한 화재로 완전 진화까지 8시간이 걸린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은 KBS, TBC, MBC 등을 통해 오전 11시 경부터 실시간으로 송출된다(손정목 2005, 71). 박정희 대통령, 전・현직 국무총리 백두진・김종필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현옥 내무부 장관과 양택식 서울시장이 진화작업을 진두지휘한다(손정목 2005, 70-1). 사망자 166명, 부상자 68명이 발생한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의 본질은 고층건물을 지으면서 고층건물 화재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손정목 2005, 72). 고가 사다리차 한 대가 없었다(손정목 2005, 82).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에 충격을 받은 고층건물 주인들과 아파트 주민들이 방화 및 대피장비의 구매를 서두르는 가운데 여의도시범아파트에서는 1971년 12월 29일 쇠사다리를 타고 아파트 외벽을 따라 내려오는 방화훈련을 실시한다(조선일보 1971/12/30, 7). 여의도시범아파트 복도 쪽 외관벽에 설치한 검은색의 철구조물은 방화 시 신속한 탈출을 돕는 사다리로 활용된다.

여의도시범아파트 네러티브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 Visualizing the invisible’ 전시 (자료출처: 홈페이지 https://plottingarchitecture.org) 
여의도시범아파트 네러티브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 Visualizing the invisible’ 전시 (자료출처: 홈페이지 https://plottingarchitecture.org) 

한편, 여의도시범아파트 복도쪽 외관벽에 설치한 검은색 철구조물은 디자인 측면에서 아파트 내부구조를 외부에 드러내는 방식의 설계와도 연관이 있다. 여의도시범아파트 네러티브 「일상화된 건축의 관찰과 기록 Visualizing the invisible」 전시 홈페이지 ‘DOCUMENTATION’ “내부구조가 드러나는 외관”을 살펴보면,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주동 정면에 규칙적 간격으로 붙어있는 수직 철재 장식물”은 “초기에 수직 루버로 계획됐다가 여러 차례 변경 과정을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이력”이 있고, 이는 “공간 모듈과 맞추어져 설계”됐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외관 디자인에 내부구조를 노출하는 방식”은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주요 디자인 요소”로서 이는 “건물의 측면과 배면 디자인에서도 발견”되며, “정면의 수직적 분할은 복도 난간의 모듈화된 요철 디자인과 함께 마치 고층 오피스 건물의 커튼월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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