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시범아파트 8

‘시범’에서 태동한 서울미래유산

‘영등포’는 근·현대사적 시·공간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사고가 도시 발달 과정에 배태한다. ‘역사정치’는 (1) 역사와 정치의 학제적 융합, (2) 역사로부터 정치적 교훈의 도출, (3)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따른 사료와 해석의 제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포함한다. 결국, 영등포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의 시·공간에서 ‘정치의 역사에 대한 전략석 해석’을 지양하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영등포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학제적 시도이다.

여의도시범아파트 연재 목록
제1편(2022/10/5, 12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제2편(2022/10/25, 13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제3편(2022/11/8, 7면) 
‘두더지 시장’ 양택식, 건설·홍보 분양 진두지휘
제4편(2022/11/23, 7면)
여의도 서재 “관수재” 주인, 시인 구상
제5편(2022/12/6, 7면)
서울특별시의 재정난을 해결한 고급아파트, ‘여의도 시범아파트’
제6편(22/12/20, 7면)
서울특별시의 재정난을 해결한 고급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
제7편(23/1/18, 7면)
‘시범’의 역사와 함께 한 여의동주민센터와 천주교여의도동성당

▲ ‘서울미래유산’ 로고 (자료출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futureheritage.seoul.go.kr)

■ 여의도와 ‘서울미래유산’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포괄하며 문화예술, 정치역사, 시민생활, 산업노동, 도시관리의 5가지 범주로 나누어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지칭한다. ‘서울미래유산’은 ▲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이해하는 데에 현저하게 도움이 되는 것, ▲ 서울을 소재로 하거나 배경으로 하는 작품 또는 서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기념물, ▲ 특색있는 장소나 경관으로서 서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 서울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현저하게 도움이 되는 것을 그 선정 대상으로 하여 (1) 시민, 시민단체, 전문가, 서울시 또는 자치구 담당 부서의 제안 → (2) 제안된 예비후보에 대한 기초현황조사 실시 → (3) 보존위원회 심의 통한 미래유산 선정 → (4) 미래유산 소유자에 대한 설명 및 동의 → (5) 서울미래유산 최종선정의 절차를 거친다. 현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동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곳은 ▲국회의사당(정치역사), ▲금성부동산(시민생활), ▲만남의 광장(정치역사), ▲여의도공원(도시관리), ▲여의도지하벙커(정치역사), ▲원효대교(도시관리), ▲윤중제(도시관리), ▲한국거래소(산업노동)의 8곳으로 이 중 여의도시범아파트와 관련한 서울미래유산은 ‘원효대교’와 ‘금성부동산’ 2곳이다.

▲ 여의도시범아파트 상가에 입주하여 2014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금성부동산’ 외장 현판 (자료출처: 박현우)
▲ 원효대교 야경 모습 (자료출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 원효대교 야경 모습 (자료출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 여의도시범아파트와 원효로를 잇는 ‘원효대교’
서울미래유산 중 도시관리 부분에 2013년 선정된 원효대교(元曉大橋)는 용산구 원효로4가와 영등포구 여의도동[여의동]을 연결하는 길이 1,470m, 폭 20m의 4차선 교량이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1447). 원효대교는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성공적 입주에서 촉발한 여의도 아파트단지의 건설과 그에 따른 교통 수요의 확대로 인하여 더 이상 마포대교만으로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건설을 추진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15, 105). 시공속도가 빠르고, 건설 후 유지보수비 및 부식으로 인한 도장비(塗裝費)가 절약되어 경제적인 독일의 디비닥(Dywidag) 공법을 최초로 도입한 원효대교는 교각과 교각 사이의 경간(徑間)을 100m로 한 콘크리트 장경간교(長徑間橋)이다(서울特別市 永登浦區. 1991, 254).

▲ 원효대교 준공 신문 1면 하단부 전단광고 (자료출처: 조선일보 1981/10/28일 1면; 경향신문・매일경제 1981/10/27일, 1면)
▲ 원효대교 준공 신문 1면 하단부 전단광고 (자료출처: 조선일보 1981/10/28일 1면; 경향신문・매일경제 1981/10/27일, 1면)

한강에서 개통한 13번째 다리로 서울시가 보상비 20억 원을 부담하고, 공사비 225억 원 전액을 시공사 동아건설이 “공익사업으로 건설한 최초의 민간교량”인 원효대교는 1978년 7월 17일 착공하여 3년 3개월 후인 1981년 10월 27일 완공한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1447; 조선일보 1981/10/28, 1; 경향신문 1981/10/27, 11). 이날 대통령 전두환(全斗煥, 1931-2021), 영부인 이순자(李順子, 1939- )는 원효대교 준공식에 참석하여 박영수(朴英秀, 1928-2003) 서울시장의 안내로 내빈과 인사를 나눈 후 안찬희 서울 제2부시장으로부터 공사개요 등 보고를 받고, 시공자인 동아그룹 최원석(崔元碩, 1943- ) 회장과 개통 테이프를 끊은 뒤 완공한 다리를 승용차편으로 시주(始走)한다(경향신문 1981/10/28, 2).

▲ 원효대교 남단에 설치한 유료도로 톨게이트 (자료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 원효대교 남단에 설치한 유료도로 톨게이트 (자료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원효대교 개통은 (1) 서부역-청파동-원효로-여의도-대방동 간 새로운 간선도로의 확보, (2) 제1한강교 및 서울대교[마포대교]의 과밀 교통량의 분산, (3) 도심과 여의도・영등포지역의 교통소통에 원활을 기하고, (4) 원효대교 접속지점인 욱천(旭川)을 복개(覆蓋)함으로써 청과시장 주변의 정비사업에 크게 기여한다(경향신문 1981/10/27, 11). 원효대교는 당초 준공과 동시 서울시에 기부채납(寄附採納) 하여 이를 서울시의 재산으로 귀속하고, 건설회사가 2001년까지 20년 동안 통행료 징수로 공사비를 보전할 계획이었으나 (1) 저조한 통행량, (2) 유료화에 따르는 부정적인 인식 확산에 따라 동아건설이 1984년 서울시에 이를 헌납하여 무료통행으로 전환한다(서울特別市 永登浦區. 1991, 254; 경향신문 1981/10/27, 11). 이에 자금난을 겪던 동아건설은 당국의 정책적 고려로 성수대교 수주에 성공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15, 107).

▲ 한국 최초로 설치된 원효대교 방음벽 (자료출처: 박현우)
▲ 한국 최초로 설치된 원효대교 방음벽 (자료출처: 박현우)

한편, 여의도시범아파트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1) 원효대교 남단 여의도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 사이에는 국내 최초로 높이 3.5m, 길이 200m의 방음벽을 설치하여 차량소음을 절반 가량 줄이고, (2) 경관 및 안전을 고려하여 교량 위 가로등을 수은가로등이 아닌 4배 이상의 촉광으로 아름답게 비치는 황색 나트륨등을 설치한다(경향신문 1981/10/27, 11). 이 방음벽은 203m의 대교 진입 부분 난간 양쪽에 철제 기둥을 2m 간격으로 세우고, 암면(巖綿)을 넣어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린 아연 철판들로 조립하여 수직벽 위에 다리 안쪽으로 방음벽을 휘게 하는 ‘ㄱ’자 형태로 세워진다(조선일보 1981/9/17, 7)

▲ 여의도시범상가에 위치한 금성부동산 (자료출처: 박현우)
▲ 여의도시범상가에 위치한 금성부동산 (자료출처: 박현우)

■ 시범상가의 나이테 ‘금성부동산’
여의도 개발 역사의 산증인이자 여의도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중개업소 중 하나인 ‘금성부동산’은 1970년 개업하여 반세기 넘게 김윤성 → 김범기 부자가 2대째 영업을 하면서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4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한국일보 2021/3/13, 14; 서울사랑 2015, 41).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토지 매매업을 하던 김윤성 대표는 그의 사촌이자 창업주인 김용성이 1970년 10월 당시 모래밭이었던 현재의 여의도성모병원 자리에서 ‘천막가게’로 영업을 시작한 곳에서 “여의도가 향후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서울시청 재직 친구의 조언에 따라 공사 중인 여의도시범아파트의 분양을 중개하기 시작한다(한국일보 2021/3/13, 14). 이듬해, ‘금성부동산’이 1971년 12월 21일 여의도시범아파트 상가에 입주하면서 김용성으로부터 김윤성 대표가 자리를 승계한다(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 홍보미디어과 2022b, 181). 여의도시범아파트 입주 이후 여의도 개발계획이 신속하게 추진되면서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한국거래소 등 금융가와 방송가가 형성됐고, 원효대교 준공과 함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여의도는 ‘서울 속 신도시’로 각광을 받는다(서울신문 2020/6/16, 21). 실제 1975년 국회의사당, 1979년 증권거래소, 1980년 KBS가 들어서면서 여의도가 정치・금융의 중심으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한다(한국일보 2021/3/13, 14).

▲ ‘시범’이라고 적힌 금성부동산 장부 (자료출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 ‘시범’이라고 적힌 금성부동산 장부 (자료출처: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여의도 개발이 절정을 이루던 1970년부터 1980년 중반까지 ‘금성부동산’ 역시 호황을 누렸으나 IMF 외환유동성위기를 겪으면서 힘든 시기를 견뎌낸다(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 홍보미디어과 2022b, 181). 2009년부터는 김윤성 대표가 그의 아들인 김범기 부장과 함께 ‘금성부동산’을 운영한다(서울신문 2020/6/1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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