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우의 영등포 '역사정치'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적 시·공간에 대한 집단적 인식과 기억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접근법이다. 박현우의 영등포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의 시·공간에서 ‘정치의 역사에 대한 전략석 해석’을 지양하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영등포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통합과 번영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여정의 시작이다.

여의도시범아파트 연재 목록
(2022/10/5, 12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2022/10/25, 13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2022/11/8, 7면) 
‘두더지 시장’ 양택식, 건설·홍보 분양 진두지휘
(2022/11/23, 7면) 
여의도 서재 “관수재” 주인, 시인 구상

서울시는 일반 시민과 입주자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1971년 5월 22일 여의도시범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개관한다. 모델하우스에는 4종(15평형, 20평형, 30평형, 40평형)의 아파트 모델을 마련하고, 1971년 5월 22일부터 8월 15일까지 전시한다. (자료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시정사진 1970-1972)

■ 토지매각으로 재정위기 극복
서울특별시는 1968년 윤중제 완공 이후 매각에 난항을 겪던 약 60만 평의 여의도 필지를 1971년 10월 준공한 여의도시범아파트(24개 동, 1,584세대)의 성공적 분양으로 대규모 판매에 성공하면서 재정건전성을 차츰 회복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76; 손정목 2005, 283). 여의도 택지를 구입한 개인과 법인 중에는 실수요와 가수요가 혼재했지만, 서울시 입장에서는 땅을 사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손정목 2003, 79). 윤중제 안의 총면적 87만 600평 중 광장, 도로, 공원녹지 등의 공공용지 32만 6,420평을 제한 나머지 54만 4,140평이 서울시가 매각할 수 있는 땅이었다(손정목 2003, 80). 여의도시범아파트 분양 후 (1) 통일교회 1만 4천 평 4억 2천만 원, (2) 국방부 9,290평 5억 원, (3) 동아일보사 3,690평 1억 9,750만 원 등 토지 매각에 따른 재정수입으로 빈사상태의 서울시 재정이 회생한다(손정목 2003, 80; 조선일보 1971/12/16, 6).

■ 아파트에 사는 ‘여의디안(Yeouidian)’
서울시의 여의도 토지 매각 이후 (1) 1974년 10월 삼익아파트(4개 동, 360세대), (2) 1974년 12월 은하아파트(4개 동 360세대), (3) 1975년 9월 대교아파트(4개 동, 576세대), (4) 1975년 11월 한양아파트(8개 동, 588세대)가 순차적으로 준공하면서 여의도에 대규모 아파트군(群)을 형성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7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 홍보미디어과 2022b, 80). 서울시는 여의도를 현대 도시의 상징인 아파트지구로 만들고자 1976년 8월 21일 
「건설부고시 제131호」를 지정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76). 여의도에는 인접한 당산동, 영등포동, 신길동, 대방동, 노량진동과는 달리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이 한 채도 없다. 그래서 ‘끼리끼리 문화’가 강한 여의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여의디안’이라면, 다른 동네 친구들처럼 골목길 구석구석을 누비며 놀아본 추억이 없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208). ‘여의디안(Yeouidian)’은 보스톤 사람을 지칭하는 ‘보스토니안(Bostonian)’과 마찬가지로, ‘여의도(Yeouido)’에 “특정 지역 출신사람”을 뜻하는 영어의 접미사 ‘ian’을 덧붙인 합성 신조어로 ‘여의도 토박이’ 내지 ‘너섬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1980년대 여의도 아파트 단지의 모습 (자료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생활문화 자료조사 영등포구 여의도)

■ ‘맨션아파트’에서 ‘여의도시범아파트’로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초창기 ‘맨션아파트’라 불린다(매일경제 1970/11/5, 6; 진유라 2007, 23; 39; 66). 1960년대 중반부터 유행한 ‘맨션’이라는 단어는 중상계급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아파트 건설에 상업적, 경쟁적으로 사용됐다(진유라 2007, 39). 맨션아파트는 “민간건설회사가 공급주체가 되어 중상계급의 시민을 대상으로 서울의 도심 고밀지구 또는 준도심의 고급 주택촌에 건립한 아파트”를 뜻한다(최윤영・심우갑 2005, 232). 여의도시범아파트는 국내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각 동(洞) 별로 설치한 고층아파트로서 중상층(中上層) 삶의 질 향상에 방점을 둔 설계를 시도한다(손정목 2003, 78).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통로를 따라 한쪽으로 단위세대나 개실(個室)을 배치”하는 ‘편복도(a single loaded corridor)’를 통해 현관 앞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면, ‘마이홈의 기분’을 느끼도록 설계한 것이다(조선일보 1970/8/19, 8). 비슷한 시기 중산층(中産層)을 위해 건설한 1970년 동부이촌동의 한강맨션아파트나 1973년에서 1974년에 걸쳐 242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22평에서 42평 규모의 중산층용 아파트 3,786호를 건설한 반포주공아파트와는 달리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승강기를 갖춘 고층아파트였기 때문에 복도가 길게 달린 ‘판상형 아파트’로 짓게 된다(경향신문 2016/3/17, 18; 손정목 280-6). 맨션아파트니, 고급아파트니 하는 이름은 얼마 가지 않아 “서울에 세워질 아파트와 아파트단지의 시범(示範)을 보이겠다”는 뜻에서 시범아파트로 바뀐다(孫禎睦 1997c, 109).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최대규모의 최대시설”로, 여의도의 주거형태를 아파트로 결정짓게 하였으며 중류층을 최소 단위로 상류층에 속하는 사회 인사를 최대 단위로 설정했다(진유라 2007, 66-7).

■ 식모방, 장독대, 엘리베이터걸
여의도시범아파트는 국내 최초로 (1) 중앙공급식 난방, (2) 공동구, (3) 고층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도입한다(손정목 2003, 78). 우리 기술로 건설한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이전까지 지어졌던 5층 아파트와 달리 고층화된 현대식 시설을 갖춘 “서울 시내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로 주거문화를 새롭게 선도한다(천현숙 2000, 79).
중상층 가정의 생활상을 담은 여의도시범아파트는 노부모, 자녀 2~3명, 식모(食母) 등을 거느린 대가족이 생활하는 호화스럽고 고급스러운 ‘딜럭스 스타일(delux style)’로서 (1) 거실 옆 부부용 내실(4.4평), (2) 내실에 붙은 부부 전용 욕실(1.19평), (3) 식당 및 부엌(4.45평) 옆의 가사실(1.79평)을 식모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조선일보 1970/8/19, 8). “주인아기 업고 잠적. 식모 온지 하루만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의도시범아파트 9동 106호 유문희(柳文熙・30) 여인은 식모 문예란(19) 양이 들어온 지 하루만에 셋째딸 박희림(2) 양을 업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경찰에 신고한 해프닝도 있었다(조선일보 1972/5/4, 7).
여의도시범아파트 상가에는 백화점에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엘리베이터걸이 있었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76). 초기 98명의 규모로 시작한 엘리베이터걸은 관리비 절감 차원에서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는 자동운행으로 전환하면서 53명이 업무를 담당한다(조선일보 1971/12/17, 6).

국내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고층아파트인 여의도시범아파트의 ‘편복도’와 현관으로 연결된 단층 계단 옆에는 장독대를 거치할 수 있는 검은색 철빔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공간이 있다. (사진촬영: 박현우)
국내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고층아파트인 여의도시범아파트의 ‘편복도’와 현관으로 연결된 단층 계단 옆에는 장독대를 거치할 수 있는 검은색 철빔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공간이 있다. (사진촬영: 박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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