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우의 영등포 역사정치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적 시·공간에 대한 집단적 인식과 기억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접근법이다. 박현우의 영등포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의 시·공간에서 ‘정치의 역사에 대한 전략석 해석’을 지양하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영등포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통합과 번영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여정의 시작이다.

여의도시범아파트 연재 목록

여의도시범아파트① (2022/10/5, 12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 서울시역의 확장과 한강연안개발계획
■ 밤섬폭파, 윤중제 축조, 본격적 여의도개발
■ 와우아파트 붕괴와 여의도시범아파트 착공

여의도시범아파트② (2022/10/25, 13면)
고층아파트 건설로 폭발적 관심 추동
■ 허허벌판 여의도 모래섬에 세워진 입주 초기의 시범아파트, 특수학군 설정으로 인기 구가
■ 단지계획의 ‘시범’을 보인 여의도시범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③ (2022/11/8, 7면)
‘두더지 시장’ 양택식, 건설·홍보 분양 진두지휘
■ 여의도시범아파트의 건설, 홍보, 분양을 직접 진두지휘한 ‘두더지 시장’ 양택식

여의도시범아파트④ (2022/11/23, 7면)
여의도 서재 “관수재” 주인, 시인 구상
■ 시인 구상의 여의도시범아파트 서실(書室) 관수재(觀水齋)여의도시범아파트

'윤중제' 3공구 밤섬 폭파행사에 참가한 김현옥 시장과 부시장의 모습.
'윤중제' 3공구 밤섬 폭파행사에 참가한 김현옥 시장과 부시장의 모습.

■ 상습 침수를 막기 위한 ‘여의도개발’
여의도는 한강의 분류(分流)에 의하여 형성된 타원형의 하중도(河中島)로, 매년 여름 홍수 때만 되면 홍역을 치른다(서울特別市 永登浦區 1991, 16). 1964년 8월에는 여의동이 완전히 고립될 정도의 수재(水災)가 발생하여 저지대 50가구가 침수 및 전파되고, 이재민 267명이 인근 초등학교와 교회 등으로 대피한다(경향신문 1964/8/11, 3). 이듬해인 1965년 7월에는 수마(水魔)로 여의도비행장 교량이 유실되고, 육군 및 공군병력이 완전철수한다(동아일보 1965/7/16, 3). 제14대 김현옥(金玄玉, 1926-1997) 서울특별시장이 취임한 1966년 4월1일 직후인 1966년 7월에도 한강이 불어나 여의도비행장에 주둔한 한미 공군이 완전 철수하고, 비행장 입구의 교통 출입을 경찰이 차단한다(동아일보 1966/7/16, 7; 경향신문 1966/7/16, 7). 이에 김현옥은 한강개발과 하수도 정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의 재가(裁可)를 받아 ‘여의도개발’에 돌입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21, 85).

1968년 5월 31일 여의도 '윤중제' 공사현장
1968년 5월 31일 여의도 '윤중제' 공사현장

■ 여의도를 위한 ‘한강개발 3개년 계획’
매해 반복되는 여의도의 홍수피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김현옥은 (1)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 택지를 확보하고, (2) 1968년 2월28일 동시에 착공한 2개의 교각으로 여의도와 마포를 잇는 서울대교[마포대교, 1970년 5월16일 준공], 여의도와 영등포를 잇는 서울교[1969년 9월28일 준공]를 연결하는 교량을 각각 건설하여 남북 제방도로를 축조하는 「한강종합개발계획」을 구상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44; 서울特別市 永登浦區 1991, 251-3). 이는 서울특별시의 급격한 인구증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의 일환이었다. 김현옥은 한강제방공사를 통해 (1) 새롭게 확보한 공유수면 매립지를 주택공급용 택지로 분양하여 개발 비용을 마련하고, (2) 교통문제까지 해결하고자 한다(안창모 2009, 218-9). 「한강종합개발계획」의 핵심인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은 일제시대부터 비행장으로 사용하던 여의도에 둘레 7.6km, 높이 16m의 제방을 쌓아 인공섬을 조성하는 1968년 2월 20일 ‘윤중제’ 착공(着工)에서부터 시작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16, 52).

1969년 8월 8일 여의도 '윤중제' 조감도
1969년 8월 8일 여의도 '윤중제' 조감도

■ 윤중제 건설로 초래한 서울시 재정난
‘윤중제’(輪中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강섬의 둘레를 둘러서 쌓은 제방”을 뜻하며 “특정 구역을 홍수의 범람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 주위를 둘러싸듯이 조성한 제방”을 의미한다(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 홍보미디어과 2022, 68). ‘윤중제’ 건설을 골자로 한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은 한강의 여러 섬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지만, 개항 이후 신설된 경인철도가 우회하여 서울의 도시구조에서 소외되었던 여의도가 도시기능의 한 축을 맡는다는 의미였다(안창모 2009, 227).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여의도 ‘윤중제’ 건설로 인하여 심각한 재정난을 겪는다. ‘윤중제’ 건설에 앞서 시는 이미 일반회계에서 10억 원을 한강건설특별회계로 전입하고, 여기에 상업은행에서 10억 원을 추가적으로 기채한다(손정목 2003, 61). 결국, 한강건설특별회계에 한강택지매각비를 합한 자금으로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을 추진한 서울시는 (1) 윤중제 공사비 30여억 원, (2) 여의도 공군시설 이전비 15억을 각각 지출하면서 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추가 기채가 필요한 위기에 놓인다(손정목 2003, 61).

■ 서울시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새로운 도전
1968년 6월1일 윤중제 완공 이후 서울시는 재정난 극복을 위해 여의도 토지 매각에 나섰지만, 난항을 겪는다. 김현옥은 1966년 4월1일 취임부터 와우시민아파트붕괴 사고로 사임 표명 후 1970년 4월15일 퇴임까지 재임 4년간 재산매각, 민자유치, 은행기채 등 소위 ‘경영행정’으로 재정위기를 버텨왔다(손정목 2003, 60). 1970년 4월 16일 임기를 시작한 제15대 서울특별시장 양택식(梁鐸植, 1924-2012)은 더 이상 매각할 시유지도 없고, 민자를 유치할 방법도 없었으며 늘어가는 은행부채와 이자부담에 위기를 느낀다(손정목 2003, 60). 결국, 서울시 재정을 살리게 할 방안도 여의도에서 찾아야만 했던 양택식은 제2부시장 차일석을 해임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토목 공학박사를 취득한 최종완을 영입하여 여의도 택지매각 방안 수립을 지시한다(孫禎睦 1997c, 109).

1972년 4월 5일 양택식 서울시장, 여의도 시범아파트 기념식수
1972년 4월 5일 양택식 서울시장, 여의도 시범아파트 기념식수

■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성공적 분양
최종완은 와우시민아파트붕괴 사고로 실추한 건축기술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허허벌판 여의도에 주민을 정착시켜 여의도 발전의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에서 여의도에 튼튼하고 외관도 아름다운 고급아파트를 건립하여 일반에 매각하는 방안을 제시한다(孫禎睦 1997c, 109). 이는 서울시가 중산층을 겨냥한 여의도 고급아파트 건설을 통해 정체한 여의도 개발을 촉진하고,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이었다(서울역사박물관 2021, 116). 초창기 ‘맨션아파트’, ‘고급아파트’로 혼재되어 불리던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서울에 세워질 아파트와 아파트단지의 시범(示範)을 보이겠다”는 뜻에서 새롭게 명명한다(진유라 2007, 23; 孫禎睦 1997c, 109). 결국, 윤중제 완공 이후 서울시의 계획과 달리 매각되지 않았던 여의도 대지를 전면 매각으로 전환 시킬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성공적 분양에 있었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76).

1972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6면 하단광고, 여의도 택지 매각 입찰공고
1972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6면 하단광고, 여의도 택지 매각 입찰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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