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우의 영등포 '역사정치'

 

프롤로그>> 박현우의 영등포 ‘역사정치’ 란?

연세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생이자 여의도 주민으로서 2021 서울미래유산 인생투어, “여의도 도심산책” 프로그램에 2021년 4월 24일 참가했다. 여의도의 시간과 공간을 거니는 시민참여형 체험 프로그램으로 근·현대사의 상흔이 오롯이 담긴 영등포의 시·공간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이 발현했다.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적 시·공간에 대한 집단적 인식과 기억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접근법이다. 체제변동의 구한말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영등포구는 근대화 도시의 팽창과 발전을 거듭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독립, 1950년 불법기습남침의 6.25전쟁과 반공체제의 확립,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추동하는 가운데 역사적 상흔을 나이테처럼 새긴 근·현대사적 시·공간을 형성해 왔다. 이에 대한 집단적 인식과 기억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작업은 영등포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통합과 번영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준거점 제시에 있어 필수적이다. 결국, 박현우의 영등포 ‘역사정치’는 근·현대사의 시·공간에서 ‘정치의 역사에 대한 전략석 해석’을 지양하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찾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모색하려는 여정이다.

■ 서울시역의 확장과 한강연안개발계획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출범한 1963년 제3공화국은 빠르게 팽창하는 도시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한강 이남까지 시역(市域)을 확장한다(서울역사편찬원 2021, 147). 1966년 4월 1일 제14대 서울특별시장 취임사에서 “수도 서울특별시의 건설과 발전이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의 번영에 직결한다”고 밝힌 ‘불도저’ 김현옥(金玄玉, 1926-1997) 시장의 취임과 함께 시작하고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 팀에 의해 완성된 한강연안개발계획의 핵심은 매년 반복되는 한강변 수해 대책으로 (1) 강변에 제방을 쌓아 (2) 그 위에 도심의 교통난 해소를 위한 강변도로를 놓고, (3) 제방 건설과정에서 발생한 택지를 매각하여 한강과 도시 개발에 필요한 재원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2016, 52; 131-2). 

■ 밤섬폭파, 윤중제 축조, 본격적 여의도개발

효율적 한강개발 촉진 전담기구로 한강건설사업소를 1968년 신설하고, 한강건설사업소는 같은 해 “새서울 건설! 금년에 이룩될 한강 여의도 강변도시 창조”라는 신문지면 광고를 통해 (1) 강변도시 건설, (2) 여의도 개발, (3) 고속도로 및 교량 건설, (4) 공원 및 유원지 개발을 공표하여 여의도개발의 서막을 알린다(서울역사편찬원 2021, 153-4). 여의도개발은 일제시대부터 비행장으로 사용한 여의도에 둘레 7.6km, 높이 16m의 ‘윤중제’ 제방을 쌓아 인공섬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김현옥 서울시장은 1968년 여의도 인근 ‘밤섬’을 폭파하여 제방 축조로 인해 좁아진 하천 폭을 넓게 함으로써 홍수에 대비하고, 서울시의 재정난 속에 제방 축조에 필요한 석자재를 현장 가까이에서 조달하여 공사비를 줄인다(최호권 2022, 44-5;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2016, 52). 하지만, 당시 서울시의 재정상태로는 ‘여의도 및 한강유역개발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개발계획의 실행이 재정문제로 난항에 봉착하자 서울시는 기조성한 여의도에 최고급·최신의 아파트 건설을 통해 재정난을 돌파하여 여의도 개발을 추동하고자 했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68). 

■ 와우아파트 붕괴와 여의도시범아파트 착공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40분 마포구 창천동 산1번지 와우시민아파트 15동이 붕괴한다(매일경제 1970/4/8, 1면).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건 다음날 사의표명을 하고, 4월 15일 인책 사임한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를 기점으로 서울시의 아파트 공급 정책은 기존의 서민층에서 새롭게 중산층으로 전환힌다(박철수 2013, 168). 이같은 상황에서 서울시는 24개동 1,584가구의 여의도시범아파트 단지 조성에 더욱 몰두한다. 왜냐면 (1) 와우시민아파트 붕괴로 실추된 서울시 건설 수준의 신용을 “시범적” 아파트단지의 건립을 통해 회복하고, (2) 허허벌판 여의도 부지에 상징적 시설을 조성하여 60만 평에 달하는 여의도 택지를 매각함으로써 서울시의 재정난을 해결해야 하는 절박함 때문이었다(손정목 2005, 283). 

김현옥 시장의 뒤를 이은 양택식(梁鐸植, 1924-2012) 서울시장은 여의도 택지 매각으로 서울시의 재정건전성을 회복하고, 김수근 등의 계획에서 시청・대법원 지구로 예정되어 있던 곳에 고급 아파트 단지의 건립을 시작한다(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 홍보미디어과 2022, 96). 그는 여의도시범아파트 사업추진을 위해 (1) 다년간 주택공사 건설이사로 재직하다 퇴임한 홍사천(洪思天)을 계획・설계・시공 일체에 관한 책임 고문으로 위촉하고, (2) 단지설계에 홍익대학교 박병주(朴炳柱) 교수, (3) 기계설비에 서울대학교 김효경(金孝經) 교수, (4) 전기설비에 서울대학교 지철근(池鐵根) 교수 등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한다(손정목 2005, 283-4). 3만 3,619평의 널찍함이 일품인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이들의 합작으로 탄생한 걸작(傑作)으로 단지계획의 표본(標本)을 만든다(손정목 2003, 78). 1970년 9월 15일 착공한 여의도시범아파트는 마침내 1971년 10월 30일 오전 완공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준공식을 가진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68; 손정목 2003, 77). 여의도개발은 현대도시화하는 서울의 대규모 주거공간 창출이라는 의미와 함께 단순한 공간 확장의 개념을 넘어 여의도시범아파트 완공을 통해 강남 개발에 앞서는 고층아파트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를 마련한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55). 

■ 허허벌판 여의도 모래섬에 세워진 입주 초기의 시범아파트, 특수학군 설정으로 인기 구가

여의도시범아파트 입주 당시 주변은 사막과 같은 모래땅으로 (1) 버스 노선이 없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2) 전화회선이 부족하여 전화 걸기도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3) 엘리베이터나 가스 고장도 잦았으며 (4) 아파트 상가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과 같은 ‘절해고도(絕海孤島)’였으나 입주 후 20여 일이 지나면서 그 불편함이 점차 해소됐다(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2021, 116; 손정목 2003, 77-8). 여의도시범아파트를 비롯한 여의도 아파트 단지는 ‘경제력’과 ‘학력’을 갖춘 중산층이 입주했다. 1971년 당시 여의도시범아파트의 거주자 분포 조사를 살펴보면, 가구당 가족수는 3~6명으로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이고, 직업은 화이트 칼라를 대표하는 공무원과 회사원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며, 학력은 대졸・고졸 이상이었고, 평균 월수입은 3만원~6만원 정도를 보이며 당시 기준으로서는 전형적인 중산층의 범주에 해당했다(권이철 2016, 14). 여의도시범아파트에 입주한 주부들의 70% 이상이 대학졸업자일 만큼 동질적인 중산층이 한데 모여 살고 있으면서 대형상가와 부대시설을 두루 갖춘 여의도 아파트 단지 형성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정책은 여의도초등학교 졸업자는 여의도중학교로, 여의도중학교 졸업자는 여의도고등학교로 진학하도록 하는 ‘특수학군제’ 도입에 있었다(서울역사박물관. 2020, 56; 손정목 2003, 78). 아파트 단지의 준공과 더불어 1971년 11월 1일에는 여의도국민학교, 1972년 12월 29일 여의도고등학교, 1972년 12월 31일 여의도중학교가 차례로 설립하여 개교한다. 여의도 특수학군제로 인하여 여의도에 주소를 둔 학생만이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자 평당 14만 원이었던 분양가격이 30만 원을 훌쩍 넘어서는 등 엄청난 인기를 얻는다(손정목 2003, 78-9). 여의도시범아파트 입주가 성공하자 그후 여의도에는 (1) 1974년 삼익주택(주)의 삼익아파트(4개동 360가구분), 한양주택(주)의 은하아파트(4개동 360가구분), (2) 1975년 삼익주택(주)의 대교아파트, 한양주택(주)의 한양아파트, 삼부토건(주), 라이프주택(주) 등도 참여하여 1978년까지 총 16개의 민간 아파트 단지가 잇달아 세워진다(권이철 2016, 20; 손정목 2003, 79).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서울시내 고층아파트의 붐을 일으킨 촉발제로서 그 역할을 한다.  

■ 단지계획의 ‘시범’을 보인 여의도시범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신속한 공급에 초점이 맞추어져 건설자금 선모집과 분양을 위해 모델하우스 설치를 통한 대대적 분양 광고를 진행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다(손정목 1999, 37-8).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고층아파트로서 내부 설계에 있어 중앙공급식 난방과 여러 개의 주거동을 연결하는 공동구가 국내 최초로 도입했고, 동부이촌동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도시가스를 도입했다(손정목 2003, 78; 권이철 2016, 64-7). 특히 18평・24평・36평・48평형을 적절히 배합하여 계층 간 위화감을 줄이려고 노력했고, 주민조직에 의한 합리적 관리를 최초로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한국 주택단지 조성에 신기원을 이루었다. 또한 여의도시범아파트 건설에 서울시는 총 60억 2,700만 원을 투자하여 역대 서울시가 투자한 단위사업으로는 최대 규모의 투자사업이었지만, 비용 전액이 입주자부담 및 상가매각비였으므로 서울시 자체 경비를 전혀 들이지 않은 성공적인 사업이었다(손정목 2003, 77). 결국, 여의도시범아파트는 명명(命名) 그대로, 한국의 단지계획에 있어 “모범을 보인다”는 뜻의 ‘시범(示範)’을 보이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이때 가장 먼저 지어진 여의도시범아파트, 한강맨션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는 ‘한강변의 골든트라이앵글’로 불리기도 했다(박해천 2011,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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