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정 시인(육필문학관장)

   

▲ 중국 두보에서 작가의 한 컷.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나니

봄이면 초목이 싹트고 자란다

봄비는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

가는 게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신다.

들길도 구름도 모두 어두운 밤

강가에 배만이 홀로 불 밝혔네

새벽녘 붉게 젖은 곳 보노라면

금관성에 꽃이 활짝 피었으리니.

춘야희우 春夜喜雨 -두보-

 

뼈만 앙상한 두보 동상이 바싹 마른 대나무 한그루처럼 표정 없는 눈빛으로 나를 맞이한다. 세상의 근심을 혼자 다 짊어진 듯, 고통만이 그를 지배한 듯 흙빛 표정이다.

매화, 녹나무,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싯가를 정할 수 없는 최고급 분재들에게 마음을 뺏긴다. 시냇물이 정자와 다리 사이를 흐르고 사계절 내내 꽃이 피는 멋진 정원을 가진 곳이 두보초당(杜甫草堂)이다. 이곳은 두보가 48세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청두에 왔을 당시 4년 동안 머물며 240여 편의 시를 쓴 집이다. 나라와 백성 걱정에 두보의 시는 현실을 비판한 시들이 많다. 두보는 고통의 한가운데 서서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런 그의 시를 시로 엮은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고 한다. 나는 사회 참여시를 잘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라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출산의 고통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두보 묘에서 일행들을 세워놓고 ‘춘야희우’를 낭독했다. 두보는 땅속에서 내 낭독을 만물을 적시는 봄비소리로 들었을까?

두보를 만나러가기 전에 ‘호우시절’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정우성(박동하 주인공)과 중국여배우 고원원(메이)이 함께 출연한 영화다. 배경이 두보초당이다.

때를 알고 내리는 비처럼, 다시 두 사람이 재회했다. 미국유학 시절 만났다가 헤어진 두 사람은 이 정우성이 출장을 갔다가 두보초당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잊혀져가던 애틋했던 감정이 기다렸다 내리는 비처럼 두 사람 가슴속에 스민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자란 대나무 숲에서 키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두보의 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두보도 젊었을 때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세월이 있지 않았었을까? 호우시절의 로맨스 영화는 영화의 스토리보다 두보초당의 배경이 영화를 돋보이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나니... 봄비 내리는 어느 날, 비를 맞으며 배우가 읊조린 두보 시 한편이 많은 관광객을 두보초당으로 부른다.

비만 내리면 어디든 달려가야 직성이 풀리던 나였다. 이백과 함께 중국 당대의 최고 시성(詩聖)두보를 만나고 보니 감회가 깊다. 엉뚱한 발상이지만 두보 시와 내 졸시 한 편을 나란히 지면 속에서나마 함께 싣고 싶다.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참으로 영광이다.

 

비는 언제나 나를 따라 다닌다

 

무설탕 커피 한 잔의 맛과

조용함을 즐기려는 내 사색의 창변에다

여지없이 빗금을 쳐버리거나

정신의 여백에도 마구잡이로

반 박자 빠른 음표를 찍어대는 빗방울

그러나 나는 이런 비가 좋아서

가슴에 쏟아지는 음표를 따라 부르노라면

멀리멀리 그리운 이의 뒷모습도 보여주는 비

이제는 그런 비하고도 정분이 나서

 

나는 언제나 비를 몰고 다닌다

비를 몰고 다니는 여자 -노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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